top of page

사카구치 안고[ 坂口安吾 ]

일본의 소설가. 순수문학부터 역사소설, 추리소설,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영역에 걸쳐 활동했으며, 대표작으로는 《타락론(堕落論)》과 《백치(白痴)》가 있다.


1906년 니이가타현[新潟県]에서 태어났다. 중의원 의원으로 있던 아버지 사카구치 니이치로[坂口仁一郎]와 어머니 아사[アサ] 사이에서 열세 명의 자녀 가운데 열두 번째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는 선조부터 넓은 영토를 지닌 지방 부호로, 아버지 니이치로는 니이가타신문사[新潟新聞社]의 사장으로도 근무했다. 아버지가 정치 활동에 대부분의 재산을 쏟았기에, 사카구치 안고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니이가타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상급생들과의 불화로 결석이 잦았다. 성적도 부진했던 탓에 부친과 형과 함께 도쿄로 거주지를 옮기며 부잔중학교로 편입했다. 교과목에 대한 학습보다는 독서 행위에 열의를 보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등의 책을 탐독하는 동시에 반항적인 낙오자를 향한 경외심을 강하게 품으며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시가[詩歌]에 있어서는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와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시를 읽으며 단가를 짓는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부잔중학교 졸업 후 에바라소학교(현 와카바야시소학교)의 임시직 교사로 채용되었다. 1926년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불교에 관한 연구를 결의해 임시직 교사를 그만두고, 동양대학인도철학과에 입학했다. 불교 서적과 철학 서적을 읽으며 연구에 열중했고, 산스크리트어[Sanskrit], 팔리어[pali], 티베트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의 어학 학습도 병행했다. 이 무렵 종합잡지 《개조(改造)》에 현상소설을 응모했으나 낙선했다.



1930년 동양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 구즈마키 요시토시[葛巻義敏], 에구치 키요시[江口清] 등과 함께 동인지 《말(言葉)》을 창간했다. 이듬해에 발행된 제2호에 첫 소설 《겨울바람 부는 술 곳간에서(木枯の酒倉から)》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동인지 《말》은 이후 《청마(青い馬)》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어서 발표한 《바람 박사(風博士)》와 《구로타니 마을(黒谷村)》을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牧野信一]가 극찬하며 일약 신진작가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는 사카구치 안고가 소설가로 인정을 받게 되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속속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등 동시대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이 무렵 여류작가 야다 쓰세코[矢田津世子] 와 교제를 시작했으나 머지않아 이별했다. 이어서 장편소설 집필에 열중한 끝에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원고 분량인 700매에 해당하는 소설 《후부키모노가타리(吹雪物語)》를 1938년 발표했으나, 기대와 다르게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실의에 빠졌다. 같은 해 집필활동을 재개했으나 전시 중에는 작품을 발표한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역사서를 닥치는 대로 읽으며 에세이와 자전 소설 등의 연구 및 집필에 집중했다. 이윽고 1946년 4월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타락론(堕落論)》을 발표, 6월에는 연달아 《백치(白痴)》를 발표하며 현대의 총아라는 호칭과 함께 전후 일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타락론》은 전쟁 가운데 발생한 윤리적인 문제와 인간의 실상을 직시한 문장으로 크나큰 반향을 불러왔고, 이와 함께 집필 속도도 빨라져 이후 독특한 역사관에 의한 작품도 속속 발표했다. 1947년 2월에는 첫 신문연재소설 《화요(花妖)》의 연재를 시작했다. 이어서 잡지 《일본소설(日本小説)》에 추리소설 《불연속살인사건(不連続殺人事件)》의 연재를 시작하며, 이후로도 다수의 추리소설을 집필했다. 같은 해 수필가 가지 미치요[梶三千代]와 결혼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가 자살한 1948년 6월 무렵부터 우울증에 의한 정신착란 상태에 빠졌다. 이후 단편소설과 에세이보다는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했으나, 불규칙한 생활 가운데 다량의 약물 복용으로 병세는 악화됐다. 인기작가였던 탓에 국세청과 겪는 세금 갈등도 말년에 이르러 심화됐는데, 이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이는 영화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1955년 잡지 《중앙공론(中央公論)》에 연재하기 위한 원고의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2월 15일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성 문학 전반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작풍을 가진 작가들을 총칭하는 무뢰파의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전후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카구치 안고 [坂口安吾] (두산백과)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재일 조선인 문학

재일 조선인 문학(在日朝鮮人文學)은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계 일본인이 쓴 문학 작품으로, 주로 메이지 시대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만 사용된다. 재일 조선인 문학의 시작 현대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이 쓴 문학 작품으로는 1883년 이수연이 쓴 작품을 들...

 
 
 
우쓰호모노가타리(宇津保物語)

헤이안 중기에 성립한 전 20권의 장편으로 작가 미상의 모노가타리 작품이다. 작품명은 기요하라노 도시카게(清原俊蔭)의 딸과 나카타다(仲忠)가 큰 삼나무의 공동(空洞, うつほ)에 살고 있던 일에서 유래한다. 그에 더하여 주제가 되고 있는...

 
 
 

Comments


  • Facebook
  • Twitter
  • YouTube
  • Instagra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