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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요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예술지상주의 작품이나 이지적으로 현실을 파악한 작품을 많이 써 신이지파로 불린다. 주로 일본이나 중국 설화집에서 제재를 취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라쇼몬」, 「코」, 「게사쿠 삼매경」, 「지옥변」, 「톱니바퀴」 등이 있다. 그의 죽음은 다이쇼 시대의 종언으로 평가받으며, 사후 소설가 기쿠치 간에 의해 ‘아쿠타가와 상’이 제정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순문학상이다.


외가에서 보낸 유년 시절 아쿠타가와는 1892년 도쿄에서 니하라 도시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액이 끼는 해라 관습에 따라 아이를 버리는 형식을 밟게 되었는데, 아쿠타가와를 거두어주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던 아버지의 지인이 그를 거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비록 정말 버려진 것은 아니지만 출생부터 굴곡이 있던 아쿠타가와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어머니의 정신병으로 외가에 맡겨졌다. 어머니의 발병은 평생 아쿠타가와의 핸디캡이 되어 자신도 미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친모가 양육이 불가능하자 외삼촌의 양자로 들어가 이모인 후키(フキ) 슬하에서 자랐다. 후키는 아쿠타가와를 기르며 평생 독신으로 산 사람으로, 끊임없이 본가에 돌아오길 권했던 친부의 바람을 거절했던 것은 이모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외가는 대대로 차와 관련된 일을 했던 집안으로 전통적인 색채가 짙은 가풍이었는데 대단히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한 양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아쿠타가와는 일찍이 문학에 두각을 나타내 11살이었을 때 스스로 회람잡지를 직접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대단히 영특하여 제일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로서 발걸음을 내딛다 개화기 시기 영어는 서양을 알기 위한 발판으로 그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재학 중 많은 서양 문학을 접했다. 1914년 소설가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와 함께 제3차 『신사조(新思潮)』를 발간하고 첫 소설인 「노년(老年)」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15년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라쇼몬(羅生門)」을 발표했지만 세간에 큰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해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데 바로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가 주최하는 ‘목요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매주 목요일 시간을 내어 밤새도록 문하생들과 토론하던 모임인 목요회는 아쿠타가와가 작가로서 자립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후에 그는 유서에서 ‘나쓰메 선생’을 진심으로 흠모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1916년 아쿠타가와는 제4차 『신사조』에 발표한 「코(鼻)」가 스승인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아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작품 「코」에 대해 앞으로 이러한 소설을 계속해서 써나간다면 문단에 유례없는 작가가 될 것이라 평가했다. 이 작품은 『곤자쿠 이야기(今昔物語)』와 『우지슈이 이야기(宇治拾遺物語)』에서 소재를 얻어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한 작품으로, 코가 큰 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방관자의 이기주의’를 나타내어 호평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에는 창작에 전념할 상황이 안 되어 해군기관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면서 집필 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2년 4개월 정도의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쓰카모토 후미와 결혼하였고, 1917년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해군기관학교를 그만두고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에 취직했다. 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근무 조건이었기 때문에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짧지만 행복한 시기였다. 아쿠타가와의 사랑 아쿠타가와에게는 원래 요시다 야요이(吉田弥生)라는 첫사랑이 있었다. 그녀는 아쿠타가와의 본가와 친분이 있는 집안의 딸로,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아쿠타가와 가문에서 요시다 야요이를 강력하게 반대해 결국 이들은 이어지지 못했다. 반대의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사랑의 실패로 아쿠타가와는 큰 상처를 받고 가족의 이기주의, 나아가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 후 아쿠타가와의 아내가 된 사람이 바로 쓰카모토 후미이다. 집 안에서 내정한 여인으로 이모들의 권유가 컸다고 한다. 아쿠타가와 또한 쓰카모토 후미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후미는 결혼 후에 창작에 매진하는 아쿠타가와의 내조에 온 힘을 쏟았고 시외삼촌 부부와 시이모를 모시며 굳건히 결혼 생활을 해냈다. 예술지상주의의 대표 작가가 되다 아쿠타가와는 단편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문장의 조탁에 뛰어나 장편보다는 단편을 더 수월하게 생각했던 듯하며 장편을 시도하긴 했으나 결국에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현대를 재해석한 유형이 많다. 친숙한 스토리인 옛날이야기를 무대로 빌리지만 주로 인간의 이기주의를 냉철하게 그려낸 아쿠타가와의 독자적인 해석이 가미되어 독자들의 큰 반향을 얻었다. 아쿠타가와는 역사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소설을 쓸 때 장애가 될 요소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 주제의 전달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적인 배경을 선택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라쇼몬」, 「코」 등이 있다. 중기에 들어서는 주로 예술지상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게사쿠 삼매경(戯作三昧)」과 「지옥변(地獄変)」이다. 「게사쿠 삼매경」은 에도 시대에 실존한 소설가인 다키자와 바킨을 모델로 한 소설로, 가족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설을 써나가는 작가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지옥변」은 『우지슈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화가를 모델로 한 소설로, 자신의 작품을 위해 딸이 불타죽는 것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에 대한 화가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인생의 우위에 예술을 두고 예술의 가치는 예술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표명한 것으로 일본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들이다. 중국 시찰과 매형의 자살 아쿠타가와는 1921년 3월부터 7월까지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 해외시찰원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 신문사에서 인기작가 아쿠타가와의 시각으로 바라본 중국을 연재하겠다는 기획으로 그를 장기간 중국에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국 시찰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도쿄에서 배를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출발했지만 기차 안에서 몸이 안 좋아져 결국 출발을 연기하고 오사카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러야 했다. 몸이 다 낫기도 전에 다시 상하이로 출발하여 결국 상하이에서도 병원 신세를 졌고, 더군다나 음식도 맞지 않아 소화불량으로 상당한 고생을 했다. 안 좋은 건강에도 항저우, 난징 및 베이징 등 다양한 곳을 취재하였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있던 데다 정치적인 상황도 좋지 않아 결국 여정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후 취재 결과는 「상하이유기(上海遊記)」, 「강남유기(江南遊記)」 등으로 발표되었다.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쉴 시간도 없이 밀려 있는 일을 하느라 신경쇠약까지 생겨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건강 악화는 결국 창작에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이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수차례 요양을 가야 했다. 아쿠타가와는 수차례의 요양 중에도 워낙 유명한 소설가였기에 손님과 출판 관계자, 기자들이 연일 찾아와 편히 쉴 수 없었다. 또 누나인 히사가 변호사 니시카와 유타카와 재혼을 하였는데 그가 위증죄로 형무소에 수감되는 바람에 아쿠타가와는 그 해결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해야 했다. 게다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조카도 보살피고 있는 상황이라 그의 부담은 상당했다. 그러던 중 히사의 집에 큰 불이 났는데 거액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남편인 니시카와 유타카가 방화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다. 아쿠타가와 누나의 집이기에 세상의 이목을 끈 이 사건은 결국 니시카와가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누나 일가를 보살피면서 니시카와가 남긴 엄청난 고리대금 빚까지 떠안았다. 이는 결국 아쿠타가와에게 큰 심적 고통을 주었다. 동료들과의 문학 논쟁 아쿠타가와는 언제나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한 작가이다. 그러한 이유로 간혹 다른 작가와 문학 논쟁을 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논쟁이 ‘사소설 논쟁’과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 논쟁이다. 아쿠타가와가 한창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의 문단은 ‘사소설’이 굳건한 아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소설’은 일본 특유의 소설로, 허구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작가 자신의 체험을 사실 그대로 그려낸 소설이다. 아쿠타가와가 ‘사소설 논쟁’에 뛰어든 것은 그의 친구인 구메 마사오가 「‘사’소설과 ‘심경’소설」을 발표하고 나서이다. 구메 마사오가 사소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산문 예술의 근본이라고 주장한 데에 대해 아쿠타가와는 「‘사’소설에 대하여」에서 다양한 문학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사소설에만 집중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이를 계기로 문단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후에 아쿠타가와는 산문 예술의 본도에 사소설을 둘 수 없다는 의견을 명확히 밝혔다. 또한 1927년 2월 잡지 합평회에서 아쿠타가와는 이야기의 재미와 예술성은 별개의 문제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일본을 대표하는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이야기의 재미는 결국 소설의 구조적 아름다움이라는 ‘구조적 미관’을 주장한다. 아쿠타가와는 이에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을 주장했으나 그의 자살로 논쟁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말년의 작품 아쿠타가와는 말년 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다수 창작했다. 특히 1924년이 되면서 역사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야스키치물(保吉物)’이라 부르는 일련의 작품군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야스키치물은 아쿠타가와로 상정할 수 있는 야스키치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군으로 사소설이라 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고백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야스키치물이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역사물에서 현대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작품군으로 그의 작품세계 전환의 실마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말년의 작품은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을 구현한 작품이나, 자살을 염두에 둔 듯 죽음에 관한 소설을 다수 집필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갓파(河童)」, 「톱니바퀴(歯車)」를 들 수 있다. 갓파는 일본 전설의 동물로, 아쿠타가와는 갓파의 세계를 통해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톱니바퀴」는 자신의 죽음이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작품으로 그의 말년의 정신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자살로 마감한 삶 1926년 그는 제국 호텔에서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치고 1927년 5월에도 다시 한 번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했다. 그리고서는 1927년 아쿠타가와는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연일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사회적인 문제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여러 장의 유서를 남겼는데 후미 부인에게는 살리려 하지 말고 자살로 외부에 공개할 경우에는 유서를 기쿠차 간에게 넘길 것을 부탁했다. 또 다른 유서에는 작품의 출판권을 이와나미(岩波)에 맡길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 이유로 나쓰메 선생님이 전집을 출판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의 죽음 이후 기쿠치 간은 『분게이슌주』 9월호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추모특집호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8년 뒤 기쿠치 간은 그를 기리기 위해 1935년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하였다. 아쿠타가와상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매년 순수문학을 대상으로 수여되고 있다. 남겨진 가족 아쿠타가와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양부는 이듬해 사망하고 이모 후키도 치매에 걸렸다. 또한 27살에 미망인이 된 부인 쓰카모토 후미는 시어른의 재혼 권유도 물리치고 이후에도 아이들과 함께 아쿠타가와를 추도하며 살았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장남과 삼남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쿠타가와의 죽음은 비단 가족뿐만이 아닌, 일본 사회에도 큰 슬픔을 안겼다. 아쿠타가와는 친구인 기쿠치 간의 이름을 훈독으로 읽어 장남의 이름을 아쿠타가와 히로시(芥川比呂志)로 지었다. 차남과 삼남도 마찬가지로 친구인 오아나 류이치(小穴隆一)의 이름 중 ‘류’를 훈독으로 읽어 아쿠타가와 다카시(芥川多加志), 그의 친구인 쓰네토 교(恒藤恭)의 이름을 훈독으로 읽어 아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로 지었다. 장남은 아쿠타가와의 예술성을 물려받아 연극 연출을 하며 배우로 활동했고 차남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전사했다. 삼남은 일본의 유명한 작곡가 겸 지휘자로 일본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주요 작품 『라쇼몬(羅生門)』(1915) 『코(鼻)』(1916) 『게사쿠 삼매경(戯作三昧)』(1917) 『지옥변(地獄変)』(1918) 『갓파(河童)』(1927) 『톱니바퀴(歯車)』(1927) [네이버 지식백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 ‘자살’로 삶을 마감한 예술지상주의 작가 (일본 문화예술인, 권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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