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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미시마 유키오(Mishima Yukio, 三島由紀夫, 1925~1970)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카로 1925년 도쿄에서 정부 고위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 기관이던 가쿠슈인을 나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대장성에서 근무했다. 가쿠슈인 시절에 릴케와 와일드, 일본 근대소설들을 탐독했고 열두 살 때부터 단편들을 습작했다. 십대 후반에 「꽃이 만개한 숲」이 그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문예문화』라는 저명한 잡지에 실리며 활자화되었다. 2차 대전 말기 군에서 소집 영장을 받았으나 때마침 감기에 걸린 데다 얼떨결에 결핵 보균자라고 거짓말을 해 징집에서 면제되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그 일로 평생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과 영웅적인 죽음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후회에 시달렸다. 작가가 되고자 했으나, 나치즘에 공감했던 무자비한 그의 아버지는 강제로 독일 법 공부를 강요해 그는 낮에는 강의를 듣고 밤에는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아버지 몰래 소설을 썼다.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은 아버지에게 소설을 쓰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자전적인 분위기가 강한 『가면의 고백』의 성공으로 미시마의 작가적 지위는 확고해졌고 이후 『사랑의 갈증』, 『금색』, 『파도소리』, 『금각사』, 『비틀거리는 여인』, 『연회가 끝난 뒤』 등의 걸작들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국제적으로도 그의 명성이 높아져 노벨 문학상 후보로 세 차례나 거론되었다. 1970년,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20세기 일본을 조망하는 대담한 기획인 4부작 『풍요의 바다』 마지막 편인 『천인오쇠(天人五衰)』를 출판사에 넘기고 곧바로 '방패회' 회원들과 자위대 본부에 난입해 평화헌법을 뒤엎는 쿠데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할복자살했다. 쿠데타 기도라는 해프닝은 미시마가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죽음이라는 의식을 치루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실제 미시마는 살아남은 나머지 방패회 회원들의 법정에서의 변호 비용까지 남겨둘 만큼 주도면밀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40편의 장편소설, 18편의 희곡, 20편의 단편집, 20여 편의 에세이집을 남겼고 그의 주요 작품들은 전 세계 25개의 주요 언어로 옮겨졌다. 그는 6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주요 발표 작품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출처: Wikimedia

[네이버 지식백과]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 Mishima Yukio] (해외저자사전,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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