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외교
- ilmunyon
- 2020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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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 외교는 대미의존(對美依存) ·반공산권(反共産圈) ·경제중심주의 외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패전 후 1952년 4월까지의 점령기간 중에는 일본은 외교자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그 대외정책은 미국의 점령정책을 구현하는 선에서 실시되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소련 등 공산권 제국이 조인을 거부한 가운데 강화조약과 더불어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다시 강화조약 발효일에 중일(中日)조약이 조인되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 외교의 반공·대미의존의 노선이 확정되었고, 한편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은 군사비 지출을 적극 줄이면서 경제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전후의 세계경제를 자유무역의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던 미국에 협력하는 것은 경제를 발전시켜서 국가가 살 길을 열고자 한 일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고, 또 자유무역의 원칙에 크게 지배된 전후의 세계경제 속에서 일본의 경제 중심주의는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 공업제국들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 가입에 의해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고, 다음해에 기시[岸] 정부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중심주의, 자유주의제국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의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에 의한 1960년의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은 양국간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띠었고, 1965년에는 역시 반공·대미의존의 기본노선에 따라 한일(韓日)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른 세계 각지에 대한 경제진출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중국의 UN 가입(1971)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신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그와 같은 아시아의 신정세에 신속한 반응을 보여,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 후 같은해 9월에 총리 다나카[田中]가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간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종래의 타이완과의 조약을 백지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선회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역조문제 해결을 강력히 추진함에 따라 일본에 외교·경제상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일본은 서방7개국정상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로 한반도 정세는 물론 중국의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가입 등 아시아 지역문제들에 대한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강화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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